책이야기

무엇에 대한 '열정'인지 궁금해하며 읽은.. [열정] by 산도르 마라이

윤크라테스 2019. 6. 24. 09:00

탁현민 씨의 특강에 갔다가 알게 된 책,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입니다. 한 개인의 운명 같은 '쓰임'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에 이 책을 언급했습니다. 탁현민 씨는 이 책을 읽으며 엄청 필사를 했다고 했습니다. 덕분에 이 책을 읽게 되었고, 저로서는 오랜만에 읽는 소설이었습니다.

 

제목이나 작가의 이름을 듣고는 어떤 책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굉장히 유명한 책이더군요. 산도르 마라이는 헝가리의 대문호라고 일컬어진다고 합니다. 이 책은 그의 사후에 발간된 책으로, 그를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았다고 합니다.

 

책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으므로 처음에는 줄거리가 궁금해서 단숨에 읽었고, 줄거리를 확인한 후에 문구를 천천히 음미하며 다시 읽었습니다. 우정, 사랑, 배신, 회한, 아픔과 고독을 통한 삶에 대한 통찰, 운명...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쓰는 소재입니다. 이 소재를 작가는 매우 특이하고 긴장감 넘치게 묘사했습니다.

 

그 자체로 교훈이 되고 멋진 문구들이 참 많았습니다. 심오하면서도 스토리에 완벽하게 녹아든 문구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독자를 가르치려 든다는 느낌은 없었습니다. 이 문구들을 읽으며, 그리고 필사하며 탁현민 씨가 그렇게 필사할 게 많았다는 그 말을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한 장군(주인공)이 손님에게 하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책의 줄거리를 쓰자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줄거리 자체보다는 제가 인상 깊었던 주제를 중심으로 몇 가지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주제는 '삶', '운명'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운명'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운명이라는 주제를 놓고 본다면, 이 책은 주인공이 맞이한 운명을 스스로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대해 주인공이 스스로 정리한 것입니다. 저자는 '운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요? 주인공이 이해하고 받아들인 이야기가 바로 저자의 생각일 것입니다. 

 

'운명'이라는 말을 직접 언급한 구절에서 그 힌트를 얻어볼까 합니다. 

 

운명이란 우연히 닥치는 불행이 아니라, 가늠할 수 없고 이해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관계의 피할 수 없는 결과이기 때문이지. (166쪽)

갑자기 닥친 '운명'처럼 보이지만, 그 일이 그때 일어나기 전에 여러 징후가 있습니다. 다만 그런 징후를 여러 가지 이유로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입니다. 장군은 자신에게 어느 날 갑자기 닥친 불행을 다각도로 분석합니다. 그 날에 이르기까지 어떤 징후들이 있었는지 자신의 기억 속 작고 세세한 증거들을 모두 모아서 분석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놓친 것은 무엇이었는지 확인합니다. 

 

운명이 직접 우리를 겨냥해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면, 두려움과 불안의 저 밑바닥에서 일종의 끌어당기는 힘을 느끼네. 인간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목숨을 부지하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위험과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운명을 접해보고 받아들이려 하기 때문일세. (184쪽)

운명에 대해 인간은 그저 수동적인 존재일뿐일까요? 내게 닥치는 운명에 나는 그저 순응하고 받아들일 뿐일까요? 인간이란 그저 가혹한 운명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존재일 뿐일까요? 저자는 장군의 대사를 빌어 '아니다'라고 합니다. 운명적 사건이 내게 일어나는 이유는 '내가 그 운명을 받아들이겠다'라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위험과 죽음까지도 무릅쓰며 접한 운명을 경험함으로써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누구나 스스로 일을 자초하기 마련이지. 스스로 자초하고, 불러오고, 피할 수 없는 일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네. 인간이란 원래 그렇다네. 자신의 행위가 치명적이라는 것을 처음 순간부터 알면서도 그만두려 하지 않아. 인간과 운명, 이 둘은 서로 붙잡고 서로 불러내서 서로를 만들어간다네. (219쪽)

내가 어쩌지 못할 대상으로 여기는 '운명'이지만, 실은 내가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하고 있는 무수한 작은 일들이 내 운명을 만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운명이 갑작스럽고 낯설게 여겨지고 왠지 모르게 억울한 이유는 내가 평소에 하고 있는 '무수한 작은 일들'이 무엇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엇을 초래할지 미처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평상시 내가 나의 운명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사 조금이라도 인식한다 하더라도 인간은 운명의 진행을 멈추거나 방향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 어렵고, 설사 인식한다 하더라도 자신을 바꾸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운명이 슬쩍 우리 앞으로 끼어든다는 말은 맞지 않아. 그게 아니라 우리가 열어놓은 문으로 운명이 들어오고, 또 우리가 더 가까이 오라고 청하는 걸세. (220쪽)

이 구절은 특강 때 탁현민씨가 인용한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는지는 잘 기억나진 않습니다. ^^;; 다만 이 구절이 너무 인상 깊어서 소설을 읽는 내내 찾았습니다.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을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근본 심성이나 성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불행은 행동이나 말로 막아낼 수 있을 만큼 현명하거나 강한 사람은 없네. (220쪽)

이 구절과 함께 '운명'에 대해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결국 '운명'이라 자신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일상과 나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깨어있지 못하기 때문에 운명이 갑작스럽고,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일상과 평소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깨어있다면, 그만큼 내 운명을 조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자는 운명적 사건이란 인간의 근본 심성이나 성격 때문에 일어난다고 정리합니다. 그리고 그가 깨어있다면 행동이나 말로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그런 사람을 '현명하거나 강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조절할 후 있는 현명하거나 강한 사람은 '없다'라고 말합니다.

 

저자는 장군의 입을 빌어 '현명하거나 강한 사람'은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자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자는 운명을 스스로 조절하는 사람을 봤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자는 소설의 주인공은 운명적 사건을 겪은 후 오랜 기간 자신을 스스로 격리시키고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곱씹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주인공은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인공은 미숙했던 젊은 시절, 삶에 대해 미처 잘 알지 못하던 상태에서 운명적 사건을 겪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자신을 젖먹이 시절부터 키워 준 유모를 제외하고, 의미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 이상 형성하지 않은 듯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만을 수행하며 오로지 자신의 젊은 시절에 발생한 운명적 사건을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분석하고 또 분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과정에서 삶에 대한 어떤 부분을 통달합니다. 

 

[열정]이라는 제목을 접하고, '도대체 무엇에 대한 열정일까?'라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우정에 대한 열정이었을까, 사랑에 대한 열정이었을까, 아니면 복수에 대한 열정이었을까.. 저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을 통해서 본 바로는, 제 생각엔 우정, 사랑, 복수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오히려 삶에 대한 분석, 운명에 대한 탐구에 주인공은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은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주인공은 자신에게 벌어진 운명적 사건을 통해 그저 비탄과 원망에 빠질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사건을 소재로 삶과 운명을 탐구했습니다. 자신의 삶과 운명, 자신이라는 인간을 열심히 분석하고 탐구하다 보니 전반적 인간의 삶과 운명, 인간이라는 존재에까지 이해가 닿았습니다. 역시 개별성이 극에 달하면 보편성으로 이어지나 봅니다. 우리가 주인공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의 이야기가 단지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보편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랜만에 소설을 읽으니 느낌이 새로우면서도 낯설었습니다. 우연히 저명한 책을 읽게 된 것도 좋은 경험입니다. 운명적 사건이 그저 한 개인의 불행으로 끝나지 않고, 삶에 대한 통찰과 깨달음으로 정리되어 좋았습니다.

 

 


여러분의 공감과 댓글은 글쓴이에게 큰 힘과 도움이 된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