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흔들흔들.. 괜찮아요.. [흔들리며 흔들거리며] by 탁현민

윤크라테스 2019. 5. 24. 09:00

[흔들리며 흔들거리며] by 탁현민

 

탁현민씨의 특강을 듣고 그의 책을 찾아서 읽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2012년 대선 패배 직후 가장 처절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내 발효의 시간'이라는 제목을 단 서문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벙해진 상태에서 모자라게 행동했고 무력해진 마음으로는 늘 미친 바람이 불었다. 그러다가 어느 때인가부터 그 덜떨어진 행동들과 미치겠는 마음들을 쓰기 시작했다.
(...)
이제 나는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이 얼빠진 에피소드들에 웃기를 바란다. 서글픈 고백에 눈물 흘려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절망에 동의해주기를 바란다. 그걸 바라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 적 있습니다. 나는 왜 힘든 순간에 바보같은 행동까지 하게 되는 걸까요? 나중에 떠올리면 창피해서 얼굴을 들기 힘든 그런 행동들, 가만히 누워 있다가 이불킥 하게 만드는 그런 행동들을요.. 상황이 힘든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말이죠.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힘든 상황에 있다는 건 뭔가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 앞에 놓인 상황에 온전히 집중을 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작고 쉬운 일도 평소와는 다르게 엉뚱하게 생각하고 그 결과로 황당한 행동을 초래하게 되는거죠. 나는 힘든데, 남이 보긴 웃긴 그런 상황입니다.

 

이 책에는 그런 내용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특히 책의 앞부분에 집중 배치되어 있습니다. 읽다가 실성한 듯이 웃은 적도 여러 번이고, 웃음을 참지 못한 것은 셀 수도 없습니다. 

 

 

 

 

 

 

저자는 힘들어 죽을 지경인데, 읽는 저는 웃긴 그런 에피소드들을 읽으며 여러 감정이 교차했습니다. 아이디어의 바다에 살고, 아무리 힘든 상황 속에서도 꿋꿋할 것 같은 저 사람도 좌절을 하는구나. 저렇게 극심한 부침의 순간을 겪어냈구나. 그런 힘든 상황에서는 무심한 표정으로 시니컬하게 말하는 저 사람도 정신을 잃을 정도가 될 수 있구나.. 그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본인은 힘들고, 보는 사람들은 웃긴 그런 웃픈 행동들을 하게 되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며 사람은 생을 살아가는 동안 겪어야 할 과목이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마다 인생의 경로와 경험의 양상은 다 다르겠지만요. 이 책을 읽으며 지구에서 생을 살아가는 존재로서 그와 나는 서로 '동지' 같았습니다. 물론 저 혼자 일방적으로요.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내용은 '존재'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여행이 길어지면서 언제부턴가 왜 이러고 있나 싶기도 하고, 왜 이렇게 되었나 싶기도 하고, 왜 이런 모습일까 하며 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면의 바닥 어디쯤에 아주 단단히 뭉쳐져 있는 것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내가 오랫동안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함으로써 그 존재의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또한 다만 존재하는 것으로는 의미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180쪽)

 

내가 뭔가 일이 잘 풀리고, 남들과 비교하여 좋은 상황에 있으면 우쭐해집니다. 그 날 뭐라도 성과가 있는 날은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나 반대 상황에서는 기분이 처지고, '내가 뭐 하고 있지?' 이런 생각이 들고,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이, 내 일상이, 심지어는 나 자체가 의미 없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성과로, 자신의 효용으로, 남들과 비교하여 자신의 의미를 측정합니다. 저자가 생각하는 것을 우리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다 비슷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는 일반인에 비해 스케일이 다소 남달랐을 뿐일 겁니다. 

 

몇 개월간의 여행 중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낯선 잠자리와 거친 음식이 아니라 다만 할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왜 스스로를 드러내어야만 존재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왜 다만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대체 어디쯤에서부터, 아니 언제부터 그랬던 것일까? (180쪽)

 

저자의 이 질문들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본의 아니게 자신의 막다른 골목의 끝에서 발견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최근에 저 스스로에게 했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질문은 얄굿게도 내가 잘 나갈 때, 기분 좋을 때는 하게 되지 않습니다. 항상 내가 가장 힘들 때, 여기가 바닥이지 싶은 그런 지점에서 하게 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된다면 그 때가 본인이 가장 바닥을 치고 있을 때라 짐작하시면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지점부터는 상승 곡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네!! 당연히 있습니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존재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걷던 어느 날, 센 강의 퐁네프 다리를 걷다 문득 '이 다리는 그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음으로 가장 오래된 다리가 되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묘한 위로가 되었다. 다만 자리를 지키고 있음으로, 다만 존재하고 있음으로도 무엇인가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 '그저 무심히 흘러가는 저 강처럼, 그리고 그 위에 버티고 서 있는 저 다리처럼 굳이 나를 드러내지 않아도, 무엇인가 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라고 소리 내어 말해보았다. 그랬더니 한결 나아졌다. 이건 정말이다. (187쪽)

 

이 구절이 '참 당연하면서도 참으로 진리다!' 싶었습니다. '그냥 있는 것, 그 자리에서 견디는 것'을 사람들이 생각보다 잘 못합니다. 이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엔 세상이 좋아서 소식이 끊어진 사람들의 근황을 우연히 알게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자신의 입지를 다진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과 저의 차이점이 무엇이었나 생각합니다. 그것은 '견디는 것'과 '못 견딘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그 장소를 떠나야 할 온갖 이유를 만들어냈고, 그리고 떠나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그 자리를 지켜냈습니다. 그런 차이였습니다.

 

저는 제가 추구하는 그 '의미'라는 것을 찾아 무던히도 헤맸습니다. 이 말은 저자의 말대로 제 존재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뭔가를 증명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기간, 어떤 성과도 낼 수 없는 기간을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변화는 때론 필요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여 뭔가 다른 의미를 찾기 위해 추구하는 변화는 위험합니다. 제가 걸어온 길의 경험은 매우 값진 것이었지만, 그로 인한 대가도 충분히 치른 셈입니다.

 

지난 번 특강에서 저자가 했던 이야기들이 더 깊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깊은 나락에서 그가 느끼고 생각했을 모든 것을 다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그래서 그랬구나..', '그랬겠구나..' 이런 것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언급했던 '쓸모'와 '쓰임'이라는 말이 더 깊이 다가왔습니다. 

     [관련 링크: 다음 '쓰임'을 위해 '쓸모'를 닦는다.. 탁현민 특강을 듣고 ]

 

 

여행중인 그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뭐가 그렇게 확 바뀌는 거 없다. 그렇지만 안 바뀌지도 않는다. (149쪽)

 

다만 그 자리에 있는 것, 다만 존재하고 있는 것은 쉬운 것 같지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세상이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고 손 놓고,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바뀔지 안 바뀔지 모르지만 그냥 자신의 일을 하고 있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의지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끝이 없을 것 같던 절망의 기간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운명처럼 제대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앞으로의 '쓰임'에 대해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운명같은 '쓰임'에 걸맞는 '쓸모'가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설사 제대로 '쓰이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존재 자체로 충분한 것. 그것이 사람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존재로서 진정한 의미일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그의 특강을 다시 되새기며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제 일상을 돌아봅니다. 뭔가가 되는 것 같은 날은 우쭐하고, 그렇지 않은 날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느끼는 저를 바라봅니다.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저도 그가 했던 것처럼 '그저 무심히 흘러가는 저 강처럼, 그리고 그 위에 버티고 서 있는 저 다리처럼 굳이 나를 드러내지 않아도, 무엇인가 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라고 크게 말합니다. 요즘 좀 별로인 것 같았던 저였는데, 좀 괜찮아졌습니다. 정말입니다.

 

 

 


여러분의 공감과 댓글은 글쓴이에게 큰 힘과 도움이 된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