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앎이야기

가까이 갈수록 더 존경하고픈 선생이 되는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윤크라테스 2019. 6. 23. 09:00

하루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학생들을 위한다며 가르치고 있는데, 내가 하는 것이 정말 애들에게 도움이 될까?'

 

나는 학생들이 동시에 만나는 여러 선생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학생들은 자신의 성향에 따라 자신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배움을 자신에게 맞게 편집하여 익히는 게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니 제가 하는 '교육'이라는 것에 더욱 겸손해져야겠다 싶었습니다. 내가 줄 수 있는 최선을 것을 제공하는 것이고, 다만 그게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어야겠다고 스스로 정리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단순하게, 산다]라는 책에서 교육에 대한 다음의 구절을 읽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며 아이들을 감독하고 지도하는 것이 교육자의 역할이다. 아이의 눈에 교육자가 높이에 따라 도약을 달리해야만 겨우 뛰어넘을 수 있는 변덕스러운 장애물로 보여서는 안 된다. 교육자는 투명한 벽이어야 하고, 그 투명한 벽 너머로는 규칙과 현실과 경계에 대한 위반이 허용되지 않는 확고부동한 세계가 분명히 보여야 한다. 
- [단순하게, 산다] 230쪽, 샤를 바그네르

 

사람은 일을 할 때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게 됩니다. '애들이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이렇게 행동했으면 좋겠다, 이것을 했으면 좋겠다' 등과 같은 직접적인 욕망 표출일수도 있지만, '다 너를 위한 거야'라는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투영하기도 합니다. 저는 학생의 결과물이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때 분노하거나 화를 내는 선생들을 만난 적도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기분이 언짢을 때 학생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기분을 풀려는 선생을 만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책에서 이런 구절을 만나서 매우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숙연해졌습니다. '선생이란 이렇게 힘든 길이구나..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교육자가 '투명한 벽'같이 되기 위해서는 학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단순하고 명확하고 분명해야 합니다. 자신의 메시지가 확실하게 정해져 있지 않거나, 그 메시지가 자신의 본심과 같지 않으면 '투명한 벽'이 될 수 없습니다. 선생 자신의 내면의 갈등 때문에 마음이 이랬다 저랬다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준이 때에 따라 달라지는 건 당연합니다. 결국 선생은 자신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와 자신이 일치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겁니다. 쉽지 않은 길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분명히 보람있는 일이고,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는 분명히 뿌듯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존경심'에 대한 다음의 구절도 인상 깊었습니다.

존경심은 아이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아이는 존경심을 바탕으로 정신적으로 성장한다. 또 아이는 막연히 뭔가를 존경하고 동경하고 싶어한다. 우리가 아이의 이런 열망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까닭에 그 열망이 시들고 변질된다. 우리 어른들이 서로 결속하며 존중하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주위 어른뿐만이 아니라 존경할 만한 모든 것에 대한 신뢰를 매일 잃러가고 있는 것이다.
- [단순하게, 산다] 232쪽, 샤를 바그네르

 

이 글을 읽으며 깊이 공감하면서, 또 슬펐습니다. 새로운 선생을 만날 때마다 '이 사람은 존경할 수 있을거야'라고 기대했다가 실망하기를 반복했던 제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어도, 중년이 되어도 새로운 선생을 만날 때 기대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기대하는 제가 아직 너무 순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그 기대를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존경하는 선생님을 꼭 만나게 될거라 기대합니다.

 

좋으면 가까이 다가가고 싶고, 친근해지고 싶습니다. 그러나 가까워질수록 그 분을 멀리서 봤을 때 가졌던 존경심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친해져서, 막역해져서가 아닙니다. 격식이 거두어졌을 때, 선생이 학생을 통제 가능한 사정권에 뒀다고 생각했을 때 나타나는 본래 모습에서 (앞에서 인용한 구절에 있는) '욕망'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생이 자신의 욕망을 절제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대단한 일입니다. 학생을 만날 때 오로지 자신이 전달해야 할 것을 전달할 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정말 인간으로서 대단한 일입니다. 어떤 학생에게 '존경할 수 있는 선생'이 되고, '가까이 갈수록 좋은 선생'이 되는 것만으로도 사회에 기여하는 것인 것 같습니다. 

 

[단순하게, 산다]에서 '어떻게 단순함을 가르쳐야 할까' 챕터를 읽으며 '가르친다는 것'에 대해 여러 방면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직업의 본분이 무엇인지 계속 탐구하고, 자신에게 맞게 재해석하고, 그것을 실천하려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바로 '소명으로서 직업'으로 인식하는 것이겠지요.

 

이것은 어느 직업이든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일 하는 것만 해도 바쁜데 이런 것까지 생각하고 따져가며 산다는 게 피곤한 일로 여겨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매일 하는 '반복된 일상을 다시 보는 방법'이고, 이게 바로 '반성적 사고'이자 '일상의 재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창조적 사고'이자, 이것에 '남들과 다른 나'를 만드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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