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변화'라는 키워드로 읽는 페르소나와 그림자.. [융의 영혼의 지도] by 머리 스타인

윤크라테스 2019. 4. 29. 09:12

[융의 영혼의 지도] by 머리 스타인

 

이 책에서 '타자와의 드러내고 감추는 관계 - 페르소나와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페르소나(가면)'라는 용어가 많이 인용되곤 했는데, 이번에 방탄의 앨범으로 '그림자'라는 용어와 함께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페르소나와 그림자는 개인의 사회생활 적응과 관련된 개인의 다양한 측면을 나타내기 때문에 우리와 더욱 친숙한 용어이기도 합니다.

 

다른 장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장을 매우 인상 깊에 읽었는데, 그 이유는 한 사람의 삶에 대한 원리를 다룬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일생동안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사람은 왜 고통받는가, 자신의 삶과 자기자신의 다양한 측면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의 목적지는 '자기 수용'을 통한 '통합'으로,  '성장하는 인간'으로 향하기 위함인 듯 합니다. 

 

페르소나와 그림자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용어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책에 정리된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 그림자: 성격에서 거절당하고 수용되지 않는 양상을 일컫는 말로, 억압된 상태에 있으면서 자아가 지향하는 이상(ideals)과 페르소나에 대한 보상적 구조를 형성한다.
  • 페르소나: 한 사람의 사회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개인과 사회 사이를 조화롭게 이어주는 정신의 수단을 말한다.
  • 자아(ego): 의식의 중심, 즉 '나'
  • 자기(self): 모든 원형 이미지의, 그리고 구조와 질서 및 통합을 지향하는 고유한 정신적 경향성의 중심, 즉 원천을 말한다.

페르소나와 그림자는 명확하게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적응을 위한 시도와 노력을 하게 됩니다. 적응이 성공적일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제가 봤을 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렇습니다.

 

  • 상황은 변한다
  • 페르소나와 그림자도 변한다
  • 페르소나와 그림자는 세트다.
  • 페르소나도 그림자도 자아가 아니다.

책에서는 이렇게 [그림자 형성]라는 서브챕터로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 자아의식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동일시하고 흡수하는 것은 자아와 페르소나의 일부가 된다. 
- 자아의식이 거절한 것이 그림자가 된다. 그림자는 의식적 자아나 페르소나와 양립할 수 없는 특성 및 특질을 갖는다. 
- 페르소나는 사회적 규범이나 관습과 양립하므로 자아가 편안하게 여길지는 모르지만, 그림자와 마찬가지로 자아에게는 이질적이다. (160쪽)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보기에 좋아 보이는 것은 놓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페르소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봤을 때 좋아보이는 것, 사회에서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들이 페르소나가 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것을 놓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즉 '자아와 페르소나의 동일시'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페르소나=자아'의 관계는 아니므로 자신이 처한 상황이 바뀌면 그 사람은 자신의 페르소나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스스로를 갈등상황으로 밀어넣게 되는 결과를 일으키게 됩니다. 새로운 환경과 페르소나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페르소나 변화] 
- 새로운 삶의 단계에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페르소나들이 나타난다. 
- 페르소나는 생애 과정에서 여러 번 변경될 수 있고 변경되는데, 이것은 변화된 환경에 대한 자아의 지각이나 그 환경과 작용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 두 사회적 환경이 어떻게 다른지 깨닫지 못하면, 사람은 이전의 습관적 행동에 갇힌 나머지 새로운 환경이 마치 이전의 익숙한 환경인 양 착각하고 반응한다. (175-176쪽)

 

우리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달라지면 그 변화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 예전 자기 방식을 계속 고집하게 됩니다. 그 방식이 그대로 통용되지 않을 때 그 분노와 실망감의 화살을 자신의 내부나 외부로 쏩니다. 그 때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은 그림자입니다. 그 방향을 자신에게 돌릴 경우 그것은 죄의식이나 수치심으로 작용합니다. 

죄의식은 행위를 분리할 수 있지만, 수치심은 자존감 전체를 빼앗아 간다. 수치심은 죄의식보다 더 원시적이며, 잠재적으로 더 파괴적인 감정의 일종이다. 우리는 이미 채택된 페르소나와 다르게 행동할 때 죄의식을 갖거나 깊이 수치스러워하는 경향이 있는데, 성격에서 그림자가 실현된 것이다. (178쪽)

 

그 방향이 외부로 향할 경우 자신은 피해자가 되고, 그와 관련된 누군가는 가해자가 됩니다. 그에 과정이 인상 깊어 소개합니다. 

심리적으로 순진하거나 방어적 저항을 보이는 사람은 자기가 갖는 지각에 초점을 맞춰 변호하며, 투사된 부분을 부정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러한 방어적 전략을 사용하면 그림자가 갖는 특성들을 인식할 수 없어 통합할 기회도 놓치고 만다. 대신 이러한 방어적 자아는 스스로 옳다고만 여기기 때문에, 스스로를 무고한 희생자나 단순 관찰자 역할을 하는 것으로 간주해버린다. 그 결과 상대방은 악한 괴물인 반면에 자아는 무고한 양처럼 느낀다. 그러한 역학 관계에서 희생양이 만들어진다. (159쪽)

 

이 과정을 자세히 말씀드리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 처리하기 힘든 상황 속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2가지 양상을 너무 적나라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 다시 말해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그 사람이 되지 못한 상황에 대해 죄의식이나 수치심을 느끼면서 괴로워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나를 그런 상황에 빠지게 만든 누군가를 원망하고 나를 피해자, 희생양으로 만들면서 괴로워합니다. 어느 편이든 자신을 괴로움이라는 수렁에 밀어 넣고 빠져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이 수렁에 깊이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혹은 수렁에 빠졌더라도 거기서 크게 다치지 않고 금방 나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변화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자기 수용을 통한 통합'으로 설명합니다. 

통합은 자기 수용에 달려 있다. 자기 수용이란 페르소나에 속하지 않은 이상적 이미지 또는 문화적 규범 같은 이미지를 자신의 일부로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사람이 수치스러워하는 개인적인 면은 철저히 악한 것으로 느껴지곤 한다. 어떤 것은 진짜 악하고 파괴적인 반면에, 그림자의 자료는 늘 악한 것이 아니다. 페르소나에 순응하지 않아서 그림자에 붙어 있는 수치심 때문에 그렇게 느껴질 뿐이다. (179쪽)

 

우리는 진짜 악한 것과 내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자신을 제대로 보호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고가 유연해야 합니다. 

 

융은 페르소나와 그림자라는 두 극이 긴장 관계에 있을 경우, 자아가 페르소나와 그림자 모두를 허용하고 무의식은 새로운 상징 형태로 창조적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내면의 빈 공간을 창조한다면 갈등이 해소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상징의역할을 통해서 페르소나와 그림자 대극의 관계가 진척되는데, 이러한 진척은 양자의 절충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새로운 태도를 갖고 세상과 새롭게 관계를 갖도록 두 대극이 연합하게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치료 요법이나 삶의 경험을 통해 이러한 두 부분 모두를 발달시킬 때 관찰될 수 있다. 즉 이전 갈등을 해소하고, 새로운 페르소나를 취하며, 수용할 수 없었던 부분을 통합할 때 관찰될 수 있는 과정이다. (181쪽)

 

이 이야기는 불교에서 말하는 '공' 사상과 통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라는 인식에서 벗어나면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옳은 것, 좋은 것'만을 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옳은 것, 좋은 것은 '지금' 상황에서의 '내' 기준입니다. 상황이 바뀌면 기준이 바뀔 수 있고, 사람에 따라 기준이 또 바뀔 수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고집하느라 내 안에서, 혹은 외부의 누군가와 갈등을 일으키는데, 이 고집을 버리면 내가 되었든 외부 누군가가 되었든 갈들을 일으킬 이유가 사라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치료 요법을 통해, 그리고 삶의 발달 과정에서 진정으로 변모된다. 적응 방편으로서의 페르소나는 변화를 위한 크나큰 잠재력을 갖고 있다. 자아가 옛 형태를 기꺼이 수정하려 한다는 사실을 감안해볼 때, 페르소나는 점차적으로 유연해질 수 있다. (181쪽)

이 챕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결론은 이것이라 생각합니다. 변화하는 상황에서 자신을 유연하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발달하는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합니다. 즉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 좋아하는 것에 대해 내려놓고  더 유연해지는 노력을 평생 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는 듯 합니다. 

 

요즘 한창 법륜스님의 [반야심경]을 통해 '공' 사상에 대해 공부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 중에 이 책의 이 챕터를 읽으니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불교와 연관지어 생각해 보면 깨달으려 하는 이유는 괴롭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융의 이론에서 페르소나와 그림자의 통합을 통한 성장하는 삶을 사는 이유는 마찬가지로 삶을 괴롭지 않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변화하는 것을 인정하고, 나도 또한 변하는 것은 그 순간에서는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인생 전반이라는 시각으로 봤을 때에는 잠깐은 힘들지만 길게는 편안한 길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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